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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도서리뷰

[도서리뷰] 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by yeonnni 2021.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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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출처-yes24)


제목: 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지은이: 펜드리드 노이스

옮긴이: 권예리

출판사: 다른

목차:

추천사

들어가며

01 [의학] 여왕의 산파 - 루이즈 부르주아 부르지에

02 [천문학] 별을 헤아리다 - 마리아 쿠니츠

03 [화학] 여성을 위한 화학 - 마리 뫼르드라크

04 [물리학] 볼로냐의 물리학자 - 라우라 바시

05 [컴퓨터과학] 숫자를 짜는 베틀 - 오거스타 에이다 바이런

06 [수학] 공중보건학자이자 통계학자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07 [의학] 다른 문을 통해 - 메리 퍼트넘 저코비

08 [수학] 고고하고 신비로운 학문 -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09 [물리학]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10 [물리학] 핵분열의 물리학 - 리제 마이트너

11 [수학] 현대 대수학의 창시자 - 에미 뇌터

12 [의학] 이동성 유전자 - 바버라 매클린톡

13 [컴퓨터과학] 해군 제독의 언어들 - 그레이스 머리 호퍼

14 [화학] 화학 결정의 신비 - 도러시 크로풋 호지킨

15 [물리학] 베타붕괴 반응 - 우젠슝

16 [화학] 신약 개발 - 거트루드 벨 엘리언

작가 후기

더 읽을거리


 

  이 책은 총 16명의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학자라고 하면 단순하게 현대의 과학자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이 책은 16세기의 산파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신약 개발자까지 다양한 분야의 여성 과학자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이 떠올랐습니다. 생애에 걸쳐 그들이 경험했던 고난과 그를 극복하고 이루어낸 업적들에 관해 짧지만 재미있게 서술되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과학자들은 각기 다른 개인적, 사회적 환경에 처했습니다.

 

  16, 17세기에 여성은 교육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독립적인 과학자로서의 입지가 매우 약했습니다. 산파였던 루이즈 부르주아 부르지에는 당시의 체액 의학 이론과 더불어 자신의 생생한 경험담을 이용하여 책을 출간했지만 당시 왕족의 사망의 원인은 두고 의사들과 논쟁을 벌인 이후 다시는 산파로서 일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마리아 쿠니츠가 저술한 책의 서문에 남편이 글을 남김으로써 여성이 혼자 연구해서 쓴 책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17세이 화학자 마리 뫼르드라크는 여성으로서 책을 써도 되는지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이 책의 서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무려 2년 동안 책 출간에 관해 고민을 거듭했고, 1656년 <여성을 위한 쉽고 쓸모 있는 화학>을 출간했습니다. 이처럼 여성이 경험을 통해 쌓은 지식이나 스스로 책을 저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시대에서도 여성 과학자들은 한걸음씩 나가았습니다.

 

부르지에는 용감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명망있는 의사들과 거의 동등한 관계로 임신과 출산에 관해 서슴없이 논의하고 협력했지요. (중략) 부르지에는 산파로서의 경험과 책을 읽고 터득한 지식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쉽게 설명했습니다. (중략) 그리고 의학의 과학적 기초를 다지는 데 이바지했으며 수많은 여성과 영아의 목숨을 살려 냈습니다. p23-24

부르지에가 쓴 임신과 출산에 관한 저서의 속표지 (출서-사라진 여성 과학자들)

 

뫼르드라크는 부르지에처럼 여성도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의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중략) 단지 여성도 스스로 배우고 익힌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줄 수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보여줌으로써 여성들이 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반들 다져 놓았습니다. p.47

 

  볼로냐의 물리학자 라우라 바시는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어렸을 때부터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볼로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또한 바시 부부는 연구를 지속하면서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하며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바시는 과학을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린 최초의 여성이었고, 학문을 탐구하는 정식 교육기관인 볼로냐 대학과 볼로냐 과학 아카데미에서 남성 과학자들과 동등하게 교류했습니다. 여성의 교육 기회를 옹호하며 다른 여성들에게 조언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바시는 보통 여성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모델이라기보다 ‘예외적으로 뛰어난 여성’에 가까웠습니다. p.58

 

  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 여성과학자도 있습니다. 17살에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나이팅게일은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서른이 넘어서야 겨우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에 관해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이미지의 나이팅게일은 헌신과 봉사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 자료에 입각한 보건 의료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한 인물입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립 위원회에 정식으로 참여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통계 분석을 바탕으로 쓴 보고서와 제안서를 이용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왕립 통계학회 회원으로 선출된 첫 번째 여성이었고, 영국에서 일반 시민에게 수여하는 가장 명예로운 훈장인 메리트 훈장을 받은 첫 번째 여성이었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출처-위키백과)

나이팅게일은 통계학을 활용해 근거 중심의 보건 의료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였습니다. 이는 간호사가 독립적인 직업 의료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썼던 그의 노력만큼이나 대단한 일이었지요. p.79

 

  19, 20세기에도 여전히 여성이 교육받을 기회는 적었고, 또한 그들의 능력을 펼칠 곳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메리 퍼트넘 저코비는 의과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파리 대학 의학부에서 입학을 거절당했고, 청강만 가능했습니다. 몇 년 동안 학생이나 인턴 역할을 해내며 반대를 이겨내고 공식적인 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년대 후반에 가장 대표적인 여사 의자이자, 남녀 불문하고 미국의 대표적인 의사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러시아의 수학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는 19살이 되던 해, 베를린 대학에 입상 신청을 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시 유럽의 대표 수학자 바이어슈트라스의 개인 지도를 받아 유럽을 통틀어 여성 최초의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마리 퀴리는 김나지움의 교감 선생님인 아버지와 사립여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던 어머니로부터 배움에 대한 열정과 근면함을 물려받았습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이 대학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에 자녀들은 차례로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였습니다. 1894년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를 만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척 헌신적이었고, 서로를 삶과 연구의 동반자로 여겼습니다.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고, 폴로늄과 라듐을 분리하여 1903년 피에르퀴리와 마리 퀴리 부부는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남편 피에르 퀴리가 죽은 후에도 연구를 지속하여 1911년 노벨 화학상까지 수상하여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 이기도 합니다. 또한 놀랍게도 마리 퀴리의 큰 딸인 이렌 졸리오 퀴리와 사위인 프레데리크 졸리오 부부도 1935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여 퀴리 가문은 2대에 걸려 노벨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좌측부터 피에르 퀴리, 이렌 퀴리, 그리고 마리 퀴리 (출처-위키미디어)

  이 책을 읽으면서 20세기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와 에미 뇌터가 가장 안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였습니다. 1907년 화학자 한과 공동으로 방사성 붕괴 연구를 시작했지만 2년 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험실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한 6년 동안 무보수로 객원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1912년까지 마이트너는 스무 편 이상의 논문을 썼지만 제 1저자는 거의 항상 한이 차지했습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간호병으로 일한 이후 91번 원소 프로트악티늄을 분리하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한의 이름을 논문 맨 앞에 썼습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 정권 이후 유대인인 마이트너는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학술 토론회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고려되었지만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고, 자신의 업적에 물리학이 전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동료 화학자 한의 노벨 화학상 수상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현대 대수학의 창시자 에미 뇌터 역시 1907년 박사 학위를 받고 8년 동안 부모님 댁에 얹혀 살면서 보수와 직위도 없이 대학에서 강의했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수학적으로 정립하는 일을 도왔지만 이때까지도 보수를 받지 못했고, 친척들의 후원금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1919년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고 유대인이었던 뇌터는 해고당했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집에서 세미나를 열 정도로 연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털털했던 그녀는 1935년 갑작스럽게 난소암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동성 유전자를 발견한 바버라 매클린톡은 코넬 대학에서 유전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당시 여성은 유전학을 전공할 수 없어서 공식적으로 식물학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이동성 유전자를 발견하는 엄청난 업적을 세웠지만 대학 측에서 여성을 정식 교수로 채용할 계획이 없어 이후 5년 간 단기 방문 연구원으로 여러 곳에서 일했습니다. 1936년, 미주리 대학에서 조교수가 되었지만 1941년 학장이 종식 재직 권한을 줄 생각이 없고, 곧 해고될 것이라고 하여 이후 매클린톡은 대학에서 일하지 않고 카네기 연구소에서 정규직 연구원이 되어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1992년에 뇌터는 마흔 살이 되어서야 ‘종신 재직 권한이 없는 부교수’가 되었고, 적게나마 월급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뇌터는 여성이었고, 유대인이자 사회주의자에 평화주의자였으므로 여러모로 불리했습니다. p. 181
당시 여성은 유전학을 전공할 수 없어서 공식적으로는 식물학 전공을 택했지만요. p.194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버그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 머리 호퍼와 관련된 일화였습니다.

 

마크 2를 작동시키던 중에 최초의 컴퓨터 ‘버그’가 나타났습니다. 기계의 계전기에 들어가 합선을 일으킨 나방 때문이었지요. (중략) 호퍼는 “그때부터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버그가 있다’고 말했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지요. p.213

최초의 컴퓨터 버그

  여성을 교육의 대상자로 보지 않아 학교에서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여성들을 학생으로써 거부했으며 교수로 채용하는 것 또한 거부했습니다. 더불어 회의, 토론회, 학회 등에는 여성이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이들의 지지나 후원을 받거나, 당대의 저명한 과학자와의 교류를 통해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최초의’ 여성 학생, 여성 연구원, 여성 회원, 여성 교수가 되어 미래의 여성 과학자들이 걸어갈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도서 리뷰를 쓰기 위해 메모 해놓았던 부분들을 비롯하여 책을 다시 한번 읽게 되었는데 추천사와 들어가며 부분이 이 책의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책을 끝까지 읽고 추천사와 들어가며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여성 과학자들이 저마다 시대적 한계와 제약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중략) 여성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 상황은 20세기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와 학교가 앞장서서 기회를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많은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 속에서 교육 기회가 부족했던 상황이 거듭 등장합니다. p.4
성차별을 비롯한 온갖 사회적 제약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성공했습니다. p.5

 

제 개인적인 평점은 3.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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