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떤 물질의 사랑
저자 : 천선란
출판사 : 아작
목차 : 사막으로/너를 위해서/레시/어떤 물질의 사랑/그림자놀이/두하나/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마지막 드라이브
2020년 7월 출간된 천선란 작가님의 단편소설 모음집입니다.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SF소설들이었고, 굉장히 많은 여운을 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총 8가지의 이야기 중 '어떤 물질의 사랑'과 '두하나'가 가장 기억에 남았습니다.
'어떤 물질의 사랑'은 본인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을 가진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라현'은 유치원 때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자신에게는 배꼽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엄마로부터 배꼽 이외에 다른 비밀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생식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한 이야기였지만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하루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라현이의 인생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춘기가 오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성별에 맞춰 몸이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심라현, 엄마 말 잘 들어. '원래 그런'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 그러니까 애들이 당연하다거나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는 거 다 듣지 마. 그거 다 너희가 아직 어려서 상대방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p. 96
사람들은 가끔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해. 그냥 상처 주고 싶어 해. 그러니까 저 사람이 왜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지 네가 생각할 필요 없어. p. 97
초등학교 첫사랑 '민혁', 중학교 선배 '풀잎', 그리고 대학교 연극영화과 '선배' 등 다양한 사람들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라현은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은 무엇이라도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지금은 굳이 나를 무엇으로든 규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무엇도 되고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 p. 121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라현이의 말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꼭 무언가 되지 않아도, 아니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가치가 충분하다는 말인 것 같아서 굉장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선배가 유학을 떠난 후 라현은 휴학을 하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서점과 카페를 같이하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라오'를 알게 됩니다. 단골손님이던 라오에게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 라현은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가까워지기 위해 독서모임을 함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라오가 외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에서 태어나 배꼽이 없는 라현과 몸에서 비늘 조각이 떨어지는 라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라현은 자신과 그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웃긴 말처럼 들를 시도 있지만 이건 생각보다 중요해요. 그걸 알아야 해요.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 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p. 143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p. 153
라현은 라오가 '우주를 가로질러' 다시 찾으러 온 그 사람이 자신과 아주 가까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응원해주며 이야기가 끝납니다.
우주를 가로지를 만큼의 사랑, 그리고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을 보면서 서로 다른 존재로 이루어진 이 지구가, 어쩌면 우주가 이렇게 유지되는 이유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두하나'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을 가진 작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허공의 물체로 인해 지구의 남자들이 좀비처럼 변한 뒤의 세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뒤바뀌던 날 잃어버린 동생 '하나'를 찾으며 치매에 걸린 엄마와 살아가고 있는 '지나'가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하나'를 알게 되고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동생 하나를 찾기 위해 간 곳에서 만난 다른 하나의 이름은 '두하나'였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음역대를 사용하는 전염된 남자들의 언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능력은 생존자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에 선택권 없이 전쟁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청각에 예민한 하나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피아노 연주였습니다.
지나는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하나를 보면서 애처로움을 느꼈고, 자신의 엄마와 하나를 만나게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몰래 빠져나가는 동안 하나의 손을 잡고 '나를 꽉 잡고 있어. 놓치면 안 돼. 언니 여기 있으니까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 속으로 외치던 지나의 모습은 자신이 지켜주지 못한 동생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 가슴이 아팠습니다.
집에 도착해 하나를 보며 다정하게 대해주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 기대어 편안한 얼굴을 하는 하나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습이 안도감을 자아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다정하고 편안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다짐하는 지나 역시 마음이 아팠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다음을 기약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다른 하나를 보면서, 엄마의 허벅지를 붙잡고 있는 하나하나 역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중략) 다음에 또 오자, 다음에 언제든지 오자. 그러다가 그냥 함께 살자. 우리 엄마를 위해서라도. p. 236-237
하나는 좀비를 소탕하기 위해 최후의 전쟁을 떠났고, 결국 생존자들은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곳으로 만에 하나라도 살아 있을지 모르는 하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지나의 모습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그마한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지나의 모습은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이 두 편의 이야기 이외에도 다른 단편 소설들 또한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평점은 4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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